
미국의 국가부채가 40조달러를 넘어섰다. 부채가 많다는 경고는 새롭지 않다. 최근 해외 언론이 주목하는 것은 부채 총액보다 국채시장의 달라진 움직임이다.
경기가 나빠질 조짐을 보여도 장기 국채 금리가 좀처럼 내려오지 않는다. 미국 국채를 사는 투자자들이 이전보다 높은 금리를 요구하고 있다는 뜻이다. 미국의 재정 문제가 주택대출과 기업 투자, AI 기업의 자금조달, 연방준비제도의 통화정책에까지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포춘 “경기 둔화에도 국채 금리가 올랐다”
포춘은 9월 6일 미국 장기 국채 금리를 둘러싼 상황이 정부 차원의 총력 대응을 요구할 만큼 심각해졌다는 로빈 브룩스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분석을 전했다. 보통 경제지표가 예상보다 나쁘면 경기 둔화와 금리 인하를 예상한 자금이 국채로 몰린다. 국채 가격이 오르고 금리는 떨어진다. 최근에는 반대 흐름이 나타났다. 경제지표가 부진했는데도 10년물 국채 금리는 올랐다.
브룩스는 재정적자에 대한 우려가 경기 둔화 효과를 눌렀다고 봤다. 미국 국채를 사려는 수요가 겉으로 드러난 것만큼 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9월 3일 기준 미국 국채 금리는 10년물 4.77%, 30년물 5.25%였다. 미국 정부가 장기간 돈을 빌리려면 연 5% 안팎의 이자를 지급해야 하는 수준이다.
월스트리트저널 “미 국채의 특별한 지위가 약해졌다”
월스트리트저널과 액시오스는 미 국채가 누려온 이른바 ‘안전자산 프리미엄’이 줄고 있다고 보도했다.
세계 투자자들은 그동안 미 국채가 안전하고 언제든 거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낮은 금리에도 국채를 샀다. 미국 정부는 이런 신뢰 덕분에 다른 나라보다 싼 이자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최근에는 투자자들이 미국 국채에도 재정과 물가 위험을 반영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이 곧 채무불이행에 빠진다거나 미 국채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안전자산이라는 이유만으로 낮은 금리를 받아주던 투자자가 줄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흐름이 굳어지면 기준금리가 내려가더라도 미국의 장기 국채 금리는 과거보다 높은 수준에 머물 수 있다. 40조달러라는 부채 총액보다 미국이 그동안 누려온 낮은 조달금리가 사라지는 것이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로이터 “미 정부와 AI 기업이 같은 자금을 찾고 있다”
로이터는 국채 금리 상승을 AI 투자 열풍과 연결했다. 미국 정부가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국채를 발행하는 동안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도 데이터센터 건설 자금을 마련하려고 회사채를 발행하고 있다. 정부와 빅테크가 같은 장기자금을 찾으면서 투자자에게 더 높은 금리를 제시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 과정은 AI 기업에도 부담이 된다. 회사채 금리가 오르면 데이터센터 투자비가 늘어난다. 시장금리가 높아지면 미래 이익을 바탕으로 평가받는 기술주의 기업가치도 낮아질 수 있다.AI 투자가 미국 경제를 끌어올리는 한편, AI 기업의 자금조달 비용과 주가에 부담을 주는 금리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뉴욕 연은 모형으로 추정한 미국의 중립금리는 2025년 1분기 1.36%에서 2026년 2분기 1.65%로 높아졌다. 중립금리는 경기를 과열시키지도, 위축시키지도 않는 금리 수준을 말한다. 중립금리 자체가 올라갔다면 연준이 기준금리를 내려도 과거와 같은 저금리로 돌아가기는 어렵다.
기준금리를 내려도 주택대출 금리는 높을 수 있다
장기 국채 금리가 내려가지 않으면 연준의 금리 인하 효과도 줄어든다. 연준이 결정하는 단기금리는 내려가더라도 주택담보대출과 회사채의 기준이 되는 장기금리는 높은 수준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30년 고정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9월 3일 기준 6.71%다. 과거 3% 안팎의 금리로 대출받은 집주인은 집을 팔고 새 대출을 받기 어렵다. 이사를 하는 순간 이자 부담이 크게 늘어나기 때문이다.
집주인들이 매물을 내놓지 않으면 거래와 공급이 함께 줄어든다. 높은 금리가 주택 수요를 억제하더라도 매물이 부족해 집값은 예상만큼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 새로 집을 사려는 사람은 높은 집값과 높은 대출금리를 함께 감당해야 한다. 하버드대 주택연구소도 낮은 금리로 묶인 기존 주택대출이 매물 감소와 집값 상승에 영향을 줬다고 분석했다.
주가가 떨어질 때 국채도 함께 하락할 수 있다
미 국채는 주식시장이 흔들릴 때 가격이 오르는 대표적인 안전자산이었다. 연기금과 자산운용사들이 주식과 국채를 함께 보유해 위험을 낮춰온 이유다. 하지만 재정 우려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부각되면 주식과 장기 국채 가격이 함께 떨어질 수 있다. 스테이트스트리트는 금융위기 이후 장기 국채가 주가 하락을 막아주는 효과가 약해졌다고 분석했다.
이런 변화가 이어지면 미국 정부의 조달비용만 오르는 것이 아니다. 주식과 채권에 나눠 투자하면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전통적인 자산배분 전략도 다시 검토해야 한다.
“알면서도 미뤄온 문제”
투자전문매체 어드바이저허브는 미국 사회가 재정적자를 오랫동안 알고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며 이를 ‘적자 주의력 결핍증’이라고 표현했다. 국채 금리가 오르고 가계와 기업의 이자 부담이 커지고 나서야 부채 문제가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존 몰딘은 미국이 정치적인 ‘부채 함정’에 빠졌다고 진단했다. 세금을 크게 올리거나 복지 지출을 줄이기는 어렵고, 결정을 미루는 사이 부채와 이자 부담이 다시 늘어나는 상황을 가리킨다.
미 의회예산국은 2026회계연도 미국의 재정적자를 1.9조달러로 전망했다. 국내총생산의 5.8%로, 지난 50년 평균인 3.8%보다 높다. 순이자 지출은 올해 1조달러에서 2036년 2.1조달러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미 재무부는 장기채 거래를 안정시키기 위해 9월부터 만기 10~30년 국채의 회당 매입 한도를 20억달러에서 최소 40억달러로 늘리기로 했다. 다만 이는 거래가 부진한 기존 국채를 사들여 시장의 유동성을 높이려는 조치다. 재정적자나 부채 총액을 줄이는 대책은 아니다.
문제는 부채보다 부채의 가격
해외 언론이 미국의 국가부도가 임박했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최근 국채 금리 상승에는 재정적자뿐 아니라 유가와 물가, 중동 정세도 영향을 미쳤다. 이들이 주목하는 것은 미국 경제에 고금리가 예상보다 오래 남을 가능성이다.
정부는 늘어난 이자비용만큼 다른 예산을 줄여야 한다. 기업의 투자비와 가계의 대출 부담도 커진다. 연준이 기준금리를 내려도 장기금리가 충분히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다. 주식시장이 흔들릴 때 국채가 손실을 막아준다는 믿음도 약해질 수 있다.
미국 부채 40조달러는 상징적인 숫자다. 금융시장에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이 앞으로 얼마의 이자를 내고 돈을 빌려야 하느냐다. 미국 국채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면 그 부담은 미국 정부에만 머물지 않는다. AI 기업과 주식 투자자, 주택 구입자도 함께 영향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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